• 최종편집 2024-02-01(목)
 
  • 40년 봉사 외길,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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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을 통해 ‘봉사의 달인’으로 알려진 손덕화 단장은 알고 보면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친근한 이웃이다. 전후 세대의 아픔을 딛고 성공한 산업명장이자 한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온 봉사자이다. 울산미래사회봉사단장, 울산 태화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으로 지역사회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경기로 한파가 서민들의 살 밑을 파고드는 시린 계절, 어려운 이웃들에게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전하고 있는 손덕화 단장의 이야기를 담았다. _박미희 기자

 

“찢어지는 듯한 가난, 말 그대로 ‘굶는 일을 밥 먹듯’ 했던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에도 저를 잡고 밥 먹고 가라던 동네 어르신들이 계셨습니다. 어릴 때 받은 도움을 지역사회에 되돌려드린다는 마음에서 봉사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봉사를 시작한 계기를 말하는 손덕화 단장. 그는 40년 봉사의 달인이다. 울산 중구 태화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 울산 미래봉사회 봉사단장으로 지역사회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따뜻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하고 있다. 

 

손덕화 단장의 고향은 경기도 수원. 8남 4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58년생인 그는 전형적인 전후 세대의 아픔을 간직한 사람이다. 원래 그의 집은 풍족했지만,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노름에 빠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남의 집 헛간에서 생활하던 1966년 겨울, 영양실조로 어린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형편에 학업을 포기하고 서울로 상경해 일찍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다니던 회사가 문 닫는 일을 잇따라 겪으며 삶의 고비를 맞이했지만, 그때 만난 따뜻한 사람의 온정에 새롭게 일어설 희망을 얻었다. “박봉을 받고 다니던 회사마저 부도가 나면서 넝마주이에 신문팔이로 연명을 했죠. 막다른 골목에 몰려 어느 날 극단적인 선택을 하러 한강 다리를 찾았는데 지나던 행인이 제 다리를 꽉 잡더라고요. ‘나도 사는데 젊은 사람이 얼마나 힘들면 이런 생각을 하느냐, 그래도 살아야 한다’라며 간곡하게 설득하더군요. 막다른 골목에서 그렇게 다시 삶의 의지를 불태우게 됐습니다.”


그는 월급을 모으고 통신고등학교를 다니며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배관기능사 자격증을 땄다. 우연히 신문에 난 울산의 조선소 구인공고를 보고 입사 지원을 해 울산에 자리를 잡았다. 38년간 현대미포조선에서 일하며 독보적인 기술력과 창의적인 아이디어 제안으로 각종 표창과 수상을 하며 산업명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그렇게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생활을 하던 그는 한 가난한 이웃을 마주하고 인생의 변곡점을 맞이했다. “울산에 내려와 자취하던 81년, 학성공원에서 우연히 한 노숙자를 봤어요. 시리도록 추운 겨울, 넝마를 걸친 노숙자를 보자 끼니 걱정을 하던 제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치더군요. 배고픈 제게 밥 먹고 가라고 권하던 동네 어르신들, 그때 받은 따뜻한 마음을 이젠 갚을 때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서른이 되던 1990년, 그는 봉사단체를 꾸린다. 지금의 울산미래사회봉사단을 만들어 어려운 이웃들을 향한 따뜻한 나눔과 봉사를 실천해온 것. 그의 봉사 기록은 국내에서 손꼽힐 정도다. 결혼이주여성들의 사회적응과 자립을 도왔고 외국인 근로자의 치과보철 치료를 지원했다. 홀몸노인들의 집을 방문해 건강을 챙기고 물품을 지원하는 일도 꾸준히 하고 있다. 보호관찰 대상자들의 사회적응과 자립을 돕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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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직업능력의달 석탑산업훈장

 

한평생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나눔과 봉사를 실천해온 그의 삶에도 굴곡은 많았다. 40대에는 희소병인 림프종, 50대에는 뇌경색으로 생사의 갈림길에 서기도 했다. 그때도 그는 봉사를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타오르는 열정으로 봉사를 실천했다. “2000년에는 혈액암 진단을 받았어요. 하지만 검사 결과가 오진이었고 희소병인 림프종으로 판명이 났죠. 그때는 그야말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어요. 가까스로 힘든 고비를 넘겼지만 2005년에는 디스크 파열로 지체 장애를 갖게 됐고 2010년에는 뇌경색으로 식물인간이 돼 병상에 누워있었어요.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나 불굴의 의지로 재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 봉사를 하러 다닐 때, 다들 저보고 미쳤다고 말하더군요(웃음). 하지만 더 춥고 외로운 이웃들을 생각하는 제 마음이 너무 간절했어요.” 

그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다시 봉사를 시작했다. ‘제발 몸부터 챙기라’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그는 불굴의 의지로 봉사활동을 펼쳤다. 더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봉사를 위해 사회복지 학위를 받고 서울까지 오가며 심리상담 교육을 이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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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자원봉사 영예의 전당 헌정

 

한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온 손덕화 단장은 2018년에 기계장치 및 전기·전자 설비보전 분야 전문가로 인정받으며 석탑산업훈장을 받는 영예를 안았으며 2020년에 ‘2020 울산 자원봉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봉사자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았다. 퇴직 이후에는 주변의 권유로 울산 태화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을 맡아 관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나눔과 봉사를 계속하고 있다. 


자수성가한 산업명장이자 한평생 봉사와 나눔을 실천해온 봉사자로 살아온 손덕화 단장. 그의 삶에 있어 봉사란 어떤 의미일까. “나눌수록 되려 받는 행복, 그것이 봉사라고 생각해요. 제가 받은 것을 되돌려준다는 뜻에서 봉사를 시작했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조금이나마 나누고 봉사할 수 있음에 감사함을 느낍니다. 근처 노숙자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쉼터를 마련하고 싶고요. 앞으로 살아있는 한 봉사와 나눔을 계속하고 싶습니다.” [1156] 




 



주간인물(weeklypeople)-박미희 기자 wp@weeklypeople.co.kr 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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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세대, 가난 딛고 성공한 산업명장 - 손덕화 울산 태화동 지역사회보장협의체 민간위원장 / 울산미래사회봉사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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